국내 유일 ‘고층습원’ 오염으로 육지화… 습지식물 생태계 ‘흔들’
강원 인제군 대암산 용늪의 눈물
국내 유일의 고산습원인
강원 인제군 대암산 용늪이 차츰
육지화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기온이
올라가고, 안개에 휩싸이는
날도 줄어들고 있다.
용늪뿐 아니라 비무장지대(DMZ)와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이북에
잘 보전된 생태계도 잦아진 집중호우,
군부대의 작전도로 포장, 경작지 확대 등으로
크고 작은 위협에 처해 있다.
지난 4일 강원 양구군 쪽에서 대암산으로 향했다. 해발 700m쯤에서 버스에서 내려 지프 등을 나눠 타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한참동안 올라갔다. 밑의 마을이 까마득하고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높아지자 군부대가 지키고 있는 정상에 다다랐다. 해발 1304m. 구름이 정상부근 능선을 가렸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국내 유일의 고층습원=용늪은 대암산 남서쪽 사면에 있는 해발 1280m의 구릉지대 일원에 형성된 고산습원을 일컫는다. 인제군 서쪽 끝인 서화면 서흥리. 양구군 동면과 맞닿아 있다. 용늪의 초입에 있는 군부대 초소의 보초병이 한여름인데도 겨울용 야전점퍼를 입고 있었다. 연중 평균기온이 4도 안팎이고 더운 여름에도 16도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영하의 기온을 유지한다. 게다가 1년 중 170일 동안 안개가 뒤덮는다.
지난해 새로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용늪의 외곽을 둘러서 돌아갔다. 용늪은 큰 용늪, 작은 용늪, 애기용늪으로 나눠져 있다. 전체 면적은 1.36㎢. 탐방로 옆 길가에는 좁쌀모양의 보라색 꽃이 핀 참조팝나무, 막 꽃이 진 개쉬땅나무, 북방계인 꽃개회나무 등이 보였다. 꿀풀, 물레나물, 대암엉겅퀴, 털이풀 등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숲 해설사 이종열씨는 “탐방로와 그 주변에 법정보호종이나 희귀식물이 있을 수 있으므로 무심코 밟아 죽이지 않으려면 바닥의 돌만 밟아야 한다”고 말했다.
큰 용늪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서 볼 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신비스러움이 온 몸을 감쌌다. 좁은 나무 데크 길을 따라가는 동안 성인키보다 약간 더 큰 신갈나무의 어린이 얼굴만한 잎이 계속 눈 앞을 가렸다. 탐방로의 전망대에서 볼 때 큰 용늪의 삿갓사초 군락이 물결치는 모습은 그냥 풀밭으로 보였다. 그러나 늪 안에서 보면 희귀식물인 비로용담과 개통발, 그리고 기생꽃, 제비동자꽃, 범의 꼬리, 끈끈이주걱 등 야생화와 온갖 곤충을 품은 독특한 생태계이자 하나의 세상이었다. 안개가 별로 없는 날씨였는데도 설명자료가 인쇄된 종이가 눅눅해졌다,
◇‘자연의 타임캡슐·고문서’=고층습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드시 높은 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식물이 채 썩지 않아 스폰지처럼 말랑말랑한 이탄층이 늪에 층층이 쌓여 있다는 뜻이다. 이탄층은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을 말한다. 보통 생물이 죽으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지만, 용늪은 일년 내내 기온이 낮고 습도가 매우 높아 생물들이 죽은 후에도 썩지 않기 때문에 이탄층이 발달한 것이다.
이종열씨가 비좁은 탐방로 옆에서 이탄층 흙을 한 줌 쥐어서 짜보니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이씨는 “이탄층은 보습력이 빼어나서 자기 부피만큼의 물을 머금는다”면서 “게다가 pH 5에서 3.7까지 나올 정도로 산도가 높아 산성에 강한 습지식물들이 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탄층 흙에는 영양물질이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다. 이에 따라 대암사초, 산사초, 삿갓사초 등 사초과의 우리나라 특산식물들과 물이끼 등 습지식물이 천국을 이룬 것이다. 5월이 되면 처녀치마를 시작으로 연영초, 금강애기나리 등이 꽃을 피운다. 백두산에서나 흔한 비로용담을 삿갓사초 사이에서 찾았다, 8월이면 희귀한 금강초롱을 볼 수 있다.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끈끈이주걱과 북통발도 빼놓을 수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탄층은 1년에 약 1㎜정도가 쌓인다. 용늪의 이탄층은 평균 1m, 가장 깊은 곳은 1.8m 가량 된다. 이탄층에서 꽃가루를 뽑아 연구한 결과 용늪의 나이는 4500∼5000살이라고 한다. 과거 한반도의 식생과 기후변화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래서 용늪을 ‘자연의 고문서’, ‘자연사 박물관’, ‘자연의 타임캡슐’이라고 부른다. 천연보호구역(1973)인 용늪은 1997년 국내 최초로 람사르협약에 따른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육지화 가속, 군부대 이전 난항=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은 용늪 주변의 오염원으로 인해 육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군부대시설과 맞닿은 작은용늪에는 꼬리조팝나무 등 육상식물이 침투해 습지 모습이 심하게 훼손됐다. 용늪이 보호지역으로 관리되기 전인 60∼70년대에는 군 부대가 큰용늪 이탄층을 제거하고 스케이트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근년에는 강수 부족과 이류무(움직이는 안개)의 발생빈도가 낮아 이탄층의 건조화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군부대의 작전도로를 통해 미국쑥부쟁이, 서양민들레, 개망초 등 습지생태계의 교란을 일으키는 외래식물이 유입됐다.
이런 변화와 맞물려 용늪의 생태계는 먹이사슬의 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도롱뇽, 달팽이, 가재 등이 나타나고, 큰용늪 안에는 분비나무, 철쭉 등이 자리를 잡았다. 용늪에 흙모래가 쌓여 천천히 육지로 변해 간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면서 머금은 물기를 잃고 경화되는 것이다.
환경부는 2010년 7월 이후로는 허가를 받은 사람에 한해서 하루 100명 이내로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원주지방환경청 최재윤 자연환경과장은 “군부대를 작은용늪과 수계를 달리하는 지역으로 이전시키로 합의했지만, 기획재정부의 반대로 45억원의 예산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