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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여행지)/경남 밀양 ( 密 陽 )

삼은정 -2012년 모습

by 현금인 http://blog.daum.net/cosmos 2012. 5. 12.

 

[나무와 성리학] ⑭ 회양목과 성의(誠意)

용재 이명구(1842~1895)는 갑신정변 이후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 경남 밀양시 부북면 퇴로에 돌아와 사당에 가서 조상께 자신의 귀향을 알렸다. 그리곤 마을 앞 당산나무(소나무)에 가서 신령님께도 귀향을 고했다. 용재는 집으로 돌아온 후 자신만이 거처할 공간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다가 종이 위에 기와집을 그리고 그림 속 집 처마 밑에 집 이름(당호)을 한 치 망설임 없이 적었다. 종이 위에 ‘삼은정’(三隱亭) 세 글자가 빛났다. 삼은은 어(漁·낚시), 초(樵·땔감), 주(酒·술)였다. 그의 ‘삼은’ 정신은 중국 동진시대 도연명이 꿈꾼 무릉도원의 세계를 모방한 것이다. 지금은 없지만 삼은정을 건립할 당시에는 주변에 무릉도원을 방불케 하는 복사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호를 적은 후 다시 집 앞에 연못을 그렸다. 연못은 물고기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 그리고 나서 그는 깊이 숨을 쉬고는, 잠깐 누워서 눈을 붙였다.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던 것이다.

 

 이명구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을 먹자마자 곧장 퇴로 서편에 위치한 서고정사(西皐精舍)로 갔다. 서고정사는 항재 이익구(1838~1912)가 1898년에 지은 별장이다. 그곳에 이명구가 심고 싶은 나무가 있기도 했지만, 그가 그곳에 간 것은 서고정사의 조영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는 서고정사를 꼼꼼하게 살핀 뒤 집 주인에게 그 뜰에 살고 있는 나무를 달라고 부탁했다. 이익구는 용재의 요청에 바로 한두 그루 가져가라고 했다. 용재는 집으로 돌아와 목수를 불러 삼은정 조영에 대해 설명하고, 당장 일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현재 팔작지붕의 삼은정 마루에는 이명구의 호인 용재 현판, 이명구가 쓴 ‘자제삼은정(自題三隱亭)’, 이익구가 1906년에 쓴 ‘삼은정기(三隱亭記)’가 걸려 있다.

 

 지금의 삼은정 건물은 서고정사와 달리 퇴락 그 자체이다. 건물은 퇴락했지만 이명구가 사랑한 삼은 중 이은, 즉 나무와 물고기는 남아 있다. 삼은정의 건물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연못은 중국과 한국의 우주관을 상징하는 방형, 즉 네모 모양에 연못 중앙에 둥근 모양의 산, 즉 수미산을 본뜬 것이다. 수미산에는 신과 만나게 하는 향나무가 살고 있다고 한다. 삼은정 연못 앞 둑에 살고 있는 나무들은 이명구의 절친한 친구들이지만, 소나뭇과의 젓나무(전나무)를 제외한 낙우송과의 삼나무와 금송, 그리고 측백나뭇과의 편백나무는 전통시대 선비들의 공간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나무이다.

 

 이명구는 항재에게 얻은 나무는 회양목이었다. 이명구는 회양목을 삼은정 뒤편 담 쪽에 심었다. 삼은정의 회양목을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는 서쪽의 작은 문을 나가야 하지만, 숲 때문에 접근하기 어렵다. 삼은정의 회양목은 내가 지금까지 본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다. 회양목은 강원도 회양(현재 북한지역)이 원산이면서도 우리나라 나무 중에서도 가장 야무진 나무이다. 대부분의 나무는 물을 운반하는 물관세포가 크고, 나무를 지탱해주는 섬유세포는 작지만, 회양목은 물관과 섬유의 지름이 거의 같은 유일한 나무다. 특히 회양목은 물관이 나이테 전체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무질이 곱고 균일할 뿐 아니라 치밀하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회양목은 가공하기도 쉬워서 상아나 옥을 대신하는 재료다. 중국에서는 황양목이라 부르는 회양목은 늘 푸른 키 작은 나무이다. 회양목은 나무의 조직이 단단한 만큼 아주 더디게 자란다. 중국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을 보면 1년에 약 3cm정도밖에 자라지 않는다. 삼은정이나 도산서당 등 선비의 공간에서 회양목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속이 단단한 이 나무의 특징 때문이다. 선비들은 회양목의 삶을 통해 자기 내면을 다스리면서도 자기 뜻을 드러낼 때 사용한 도장의 재료로 활용했다. 그래서 회양목을 ‘도장나무’라고 부른다. 더욱이 회양목은 생원과 진사들이 사용한 호패의 재료였다.

 

 

삼은정 서편 담장 옆에 서 있는 회양목. 강판권 교수 제공

 

회양목은 나무질이 치밀하다
선비들은 자기 뜻을 드러낼 때
사용한 도장의 재료로 활용했다

 

이명구가 삼은정에 회양목을
가장 나중에 심은 것은
자신의 뜻을 가장 잘 품고 있는
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 나무를 찾은
이명구는 ‘성의’를 실천했다

 

 

 이명구가 삼은정에 회양목을 가장 나중에 심은 것은 그만큼 귀한 나무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뜻을 가장 잘 품고 있는 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양목을 심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나무를 찾았다. 이 나무를 통해 자기 뜻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이명구는 회양목을 통해 ‘성의’(誠意)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성의는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선비의 뜻은 결국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려면 마음속의 생각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성의의 ‘성’은 <중용>의 핵심 개념이자 성리학자들의 삶의 철학이다.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리이고,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우주 만물의 운행이 곧 성실한 것이고, 성실한 것은 진실한 행동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생산할 수 없고, 성실해야만 만물은 생성된다. 회양목의 곧은 성질은 곧 이 나무의 성실한 삶을 반영한다. 이명구는 봄에 매실나무, 살구나무, 복사꽃을 감상했으며, 여름에 삼은정 뜰 서쪽의 샘에서 물을 길어 더위를 식혔다. 지금도 삼은정 마당 서편의 샘에는 맑은 물이 있다. 그는 가을에 샘 옆에 살고 있는 세 그루의 감나무에서 감을 따서 먹었다. 겨울에는 주로 회양목을 만났다. 다른 나무들은 해마다 성장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지만 회양목은 자라는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회양목을 만나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특히 그는 겨울에 회양목의 뿌리를 거쳐 내려온 샘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시간을 즐겼다.

 

 이명구의 자는 ‘학수’(鶴叟)이다. 그의 자만 봐도 어떤 삶을 추구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학의 흰 색깔은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삶이다. 그는 속세에 때 묻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뛰어난 재주로 어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면서 자랐지만, 이른바 출세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38살이 되어서야 과거시험에 관심을 두고 소과(문과의 생원진사과)도 거치지 않은 채 1880년 병을 앓던 왕세자의 쾌유를 축하하는 별도의 시험에서 병과에 합격해,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이명구는 홍문관에 들어간 지 10년 만인 1890년에 정5품에 해당하는 홍문관 교리로 승진했다. 교리는 홍문관의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옥당’(玉堂)이라 불렸다. 그는 홍문관 교리의 자격으로 임금에게 경전을 강독하는 영광을 얻었을 뿐 아니라 철종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이명구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한강 정구(1543~1620)이다. 그가 퇴계와 남명의 제자였던 정구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은 것은 조선 성리학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1888년 고종에게 정구를 문묘에 모실 것을 주장했다. 문묘에 모시는 분들은 조선 성리학의 최고 인물이다. 따라서 정구를 문묘에 모시자는 것은 그를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공인하자는 것과 같다. 당시 문묘에는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 14명의 조선 인물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명구의 주장에 대해 문묘에 모시는 일은 신중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이유로 곧장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명구가 한강 정구를 숭상한 것은 그만큼 성리학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려는 삶의 태도 때문이었다. 한강 정구는 1563년 20살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1573년 홍문관 정자였던 같은 고향 출신의 김우옹(1540~1603)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37살 때 처음으로 창녕 현감에 나갔다. 이명구의 삼은정은 정구가 만년에 고향 성주에서 백매원(百梅園)을 만든 것과 아주 유사하다. 정구가 자신의 거처에 매실나무를 심어 만년을 보냈듯이, 그도 나무를 심어 만년을 보냈다. 삼은정의 회양목은 지금도 용재의 정신처럼 여전히 씩씩하게 살고 있다.

 

 

연못의 구조가 사각형의 틀에 가운데 원형태의 섬이 위치해 있다.

이것은 성리학의 천원지방설에 따라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이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조경을 했다고 한다.

중간에 작은 동산이 있으므로  동산을 중심으로 물이둥글게 계속돌기때문에 물이 썩지않는다..

 연못에 연을 심는것도 물이 썩지않게 하는  정화작용을 하기때문이다.

 

 

 

 

 

 

 

 

 

 

 

 

 

 

 

 2011년 6월 3일 방문  - 이곳에 기거하시면서 관리만 해주시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은 여주이씨 후손이 아니시다.

 

 

 

 

 

 

 

 

 

 

 

   2012년    삼은정은 1904년 여주이씨 후손이 지은 정자이다 . 삼은정 (三 隱 亭) =  물고기.  나무.  술) 을 의미하는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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